자비로운 사랑


데레사가 그 온 넋을 다해서 믿고 있던 사랑은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 '자비(慈悲)로운 사랑'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결정적인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 지상에 있는 우리들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아무 공덕도 없는데 사랑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대로 즉 비참한 그대로 무상으로 사랑하신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기막힌 비참 때문에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시며, 사랑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불쌍히 여겨져야 될 자들입니다.

 

사실 우리의 탁신(託身)의 현의(玄義)와 하느님의 성혈에 구속(救贖)의 현의에 관해서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체 현의를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들은 철학적 문제일까요? 사변가의 추리에 맡겨질 문제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에 알려지는 문제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절대적인 가련함을 보고 그것을 양해하는 한 영혼에게, 그리고 이 가련함에 대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를 믿는 겸손한 영혼에게 적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이 현의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라면, 이 현의의 사랑에 실제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 믿음이 얼마나 필요한 것일까요! "내 작은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내가 자신의 작음과 가난함을 사랑하고 있음을 하느님께서 보신다는 것이고,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애절한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얼마나 깊이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말입니까!

 

우리 신학자들은 흔히 무엇이나 설명하려고 하고 알려고 하며 모두를 이론적인 추리에 따르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느님을 아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낮추었을 때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단순한 믿음, 즉 우리의 벗을 수 없는 가련함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에의 믿음으로 하느님 안에 들어갈 때 비로소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직관적인 데레사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성 바오로가 '비추어진 마음의 눈'이라는 부르는 눈길, 즉 정신 작용보다도 마음을 써서, 지성보다도 사랑으로써 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밝게 비추어진 데레사는 하느님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찾아 얻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감히 하느님의 자녀로 자처하여 하느님을 사랑했습니다. 자기의 가련함 그대로 순진스럽게 이 좋으신 하느님과 감히 친밀한 관계에까지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하느님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다함없는 사랑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거리낌없이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믿음은 그녀의 태도를 그 안에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만을 위해 가려놓은 저 이름 '자비로운 아버지', 이 자비로운 아버지로부터 자비로운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불쌍한 우리 자신에게 '불쌍히 여겨 주시는 이'로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를 맡겨 드리는 것이, 이것이 우리 영혼의 온 생활입니다. 그런데 이 자비로운 사랑을 굳게 믿는다는 강직한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의 섭리에 자기를 맡겨 드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과연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신앙은 무엇보다도 우선 지성에 속하는 덕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역시 마음도 의지도 함께 활동합니다. 사랑은, 다시 말하면 애덕은 신앙으로써 밝아진 지성의 능력이며 신앙은 사랑의 눈을 더 예민케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이 데레사의 신앙이며, 그녀의 신앙의 눈길이었습니다(비추어진 마음의 눈). 그리고 사랑의 억누름에서 생기는 영혼의 직관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신앙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성인이 하신 다음 말씀의 참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이는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1요한 4:8)."

 

신앙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자비로운 사랑'으로 보여 주고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깨우치어 이렇듯이 자애로운 하느님을 한껏 사랑하도록 충동합니다. 이 부축임에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면 신앙은 더욱 깊이 그 대상인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며,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가난한 마음이 목마르게 찾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신앙은 더욱 견고한 확증을 갖고 평화로운 어떤 직관으로 스스로가 찾아낸 사랑과 자비로운 하느님 안에 길이 쉬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다함없는 사랑, 그리고 자비로운 사랑, 이것이 사도 성 바오로와 성 요한이 우리 신앙의 눈길 앞에 내놓는 주제입니다. "대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에페 2:4-5)." "우리가 하느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 당신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로 보내셨습니다(1요한 4:10)." "우리야말로 우리에게 대하여 가지신 하느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믿는 자입니다(1요한 4:16)."

이것이 성 복음서가 요구하고 데레사가 깨달은 신앙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데레사에게 부탁합시다. 단순히 그리고 겸손하게 자비로운 사랑을 믿읍시다. 불쌍한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하느님의 순수하고 자비로운 사랑을 믿읍시다. 우리의 교만한 지식일랑 아예 부수어 버립시다. 그리고 우리가 무식하고 가련한 자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기도합시다. 은혜 중에 은혜! , 데레사와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곧바로 단순하고도 철저한 신앙의 은혜를 청합시다. 거기에 성성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 작은이여, 나에게로 오라 p25-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