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소화수녀회는 창립자 김준호 레오 선생의 영적 가르침 아래, 1956년부터 복음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미소함을 본받기 위하여 이끌림을 받은 자매들이 의지할 곳 없는 결핵환우들과 노약자, 걸인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며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시작 되었다. 1970년대부터 차츰 가톨릭 신앙을 따라 독신 봉사 생활을 하고자 하는 젊은 자매들이 모여왔다. 이에 김준호 레오 선생은 영적 책임을 자각하여 이들이 완덕에 이르는 과정을 동반할 수도회가 탄생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즈음 공동체의 안팎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1978년 조철현 비오 사제를 만나게 되어 점차 가톨릭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영적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자비로우신 은총으로 창립자 김준호 레오 선생과 공동 창립자인 조철현 비오 신부의 동일한 사도적 사랑의 체험 안에서 1999년 1월 18일 광주대교구로부터 수녀회 설립 허가 및 회헌의 인준을 받았다. 소화(小花)수녀회는 이름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낮은 곳에서 작은 불씨로‘사랑의 성소’를 살아가며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시대의 길이 되어 주는 복음의 증거자로서 쇄신의 여정을 걷고 있다.

거룩한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은혜로 프란치스코 성인과 소화 데레사 성녀의 가난과 작음의 영성에 따라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가난한 존재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자비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작은 불씨가 되어 살고, 사도직 활동과 관상생활의 조화를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지향하는 기도생활을 하고 있다.

1950년대
창립자 김준호(1924~2010)선생은 1944년 일본군에 의해 강제 징병되어 끌려갔다가 해방직후 한국에 돌아왔다. 그 후 의사가 되고자 준비를 하던 중 1946년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사시는 이현필 선생과의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 프란치스코의 ‘완덕의 거울’에 깊은 감화를 받아 절대 자비심에 눈뜨게 되어 성스런 가난을 가슴에 안고 그 길을 찾아 나섰다. 해방 후와 6.25를 거치면서 이현필 선생 밑에서 가난과 순종을 배웠고 독신생활을 유지하면서 광주천 다리 밑으로 들어가 걸인들 곁에서 그들과 동일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956년 제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결핵환우를 통해 성녀 소화데레사가 쓴 시 “사랑을 살다”를 읽게 되면서 가난도 병도 성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생은 제중병원의 무료병원에서 만난 많은 환우들이 갖고 있는 영육의 아픔, 절망, 고통을 보고 결핵 요양소를 창설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갈 곳 없는 무의탁 결핵 환우와 노약자, 걸인, 장애인 등 소외받고 불우한 사람들을 동반하기 위하여 그해 3월 광주시 북구 화암동에 ‘무등원’을 설립하여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1958년에 무등산 상봉 밑 800미터 고지에 하느님으로 채워나가는 영혼들의 영적 쉼의 공간이며 수도에 뜻을 둔 봉사자들의 터전으로 작은 움막집 기도처가 마련되었다.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인재양성과 마음에 부어진 사랑의 힘으로 봉사하기를 바라는 뜻이 담긴 첫 기도실이다. 일식(一食)을 하면서 성서와 영적독서 묵상, 침묵생활로 규칙을 세워 여러 봉사자들이 돌아가며 생활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돌보게 된 무등원 공동체는 기도와 섬김, 노동으로 자립생활의 기반을 이루며, 백여 명이 넘는 결핵환우들의 완치와 사회복귀를 도왔다.
1960년대
무등산 중턱에 제4수원지가 생기자 정부에서는 상수원에 결핵환우들이 살면 저수지에 결핵균이 오염될 우려가 있다하여 철거명령을 내렸다. 이 막막한 상황에 카딩턴 원장은 김준호 선생에게 광주시 남구 봉선동 52번지에 전 500평의 땅을 마련해 주었다.1968년 4월 전북 완주군 구이면 용복리 독배마을에 유영모 선생(1890-1981)의 후원으로‘전주분원(1968-현재)’이 설립되었다.

광주 무등원에서 살았던 봉사자 자매들과 결핵이 완치된 후에도 독신으로 봉사하며 살겠다고 남은 형제자매들과 새로 예수님의 정배로 살겠다고 출가한 봉사자 자매들을 비롯하여 30여명이 전주분원에서 함께 살았다.
1970년대
식량지원 구호의 손길이 끊어지고, 그 당시 광주 기독병원 병원장이던 카딩톤 원장도 한국보다 더 어려운 나라를 택하여 떠나버리자 무등자활원 가족들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미인가로 70여명의 환우 가족들 생계유지를 위해 누에치기, 젖소와 젖 짜는 양, 양돈, 농사, 한봉, 양봉, 죽염 등을 통하여 자립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노력을 했지만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김준호 선생을 정신적 지도자로 모시던 김천자 세라피나가 무등자활원의 초대원장으로 임명되어, 가난과 빚에 시달리는 무등자활원의 자립생활을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또한, 뜻 있는 지인들을 모아 이사회를 구성하고 조아라 여사를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하여 당시 어려운 현안 문제를 많이 해결하였다.

1978년 무등자활원이 존폐위기에 처했을 때 인연이 된 조철현 비오신부는 당시 계림동 성당교우들과 함께 공동체를 방문하여 미사집전을 해 주었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 계속적으로 성빈첸시오 회원들과 함께 도움의 손길을 이어갔다.

창립자 김준호 선생은 수도생활을 지망하는 봉사자 자매들의 영육의 쉼과 재충전을 위해 1975년 광주 화암동‘무등산 분원’을 설립하였고, 1978년 전북 장수군에‘지지리 분원’을 설립하여 그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기도하였고, 교파를 초월한 많은 영적 만남을 가졌다.
1980년대
김준호 레오선생과 조철현 비오신부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교회의 일치 안에서 동정의 삶을 뿌리내릴 수 있도록 수도회 창설을 협의하였고, 1981년‘무등자활원’이란 공동체명을 소화데레사 영성에 따라‘소화자매원’으로 개명하였다.

조비오 신부는 소화 공동체만큼 어려운 시설이 없다고 판단하여 전국 각지에서 은인들의 도움의 손길을 모우는 후원요청을 가톨릭신문에 내면서 후원회가 결성되었고, 매월 후원회 미사와 피정지도를 하였다.

정부지원 또한 없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1985년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였고, 사회복지 사도직 운영을 하였다.
1990년대
기존의 소화정신요양원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을 분리하여 맞춤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하여‘소화천사의집’을 설립하였다. 또한, 사회복지 사도직에 수행하는 과정에서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청원자수녀들의 주1회 방문을 통해 소화가족들의 관계형성을 도모하였고, 천주의성요한 수도회와 천주의성요한병원의 체계적인 서비스를 지원받는 방법으로 연계성을 살렸다.

반면 새로운 사도직 방향으로 생명을 살리고 친환경적이고 건강에 유익한 EM을 일상생활에서 적용하고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EM 원액으로 쌀뜨물을 발효시켜 EM 활성액을 만들어 사회복지 생활시설에서부터 친환경적이고 건강에 유익하도록 일상생활에 적용하였다. 당시 직업재활프로그램으로 개발하여 EM비누 제조용 기계를 특수 제작하여 EM비누를 만들어 EM 환경 살리기 홍보 캠페인을 통하여 친환경사회의 실현에 선도적 활동을 추진하였다.
생명을 살리는EM(Effective Micro-organisms)
: 일상생활에 적용과 개발
초기생활은 가족적 분위기로 20∼30명씩 자연환경이 좋은 무등산에서 소수의 공동체로 친환경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회복지현장에서는 단체생활에 있어서 살균소독 효과가 강력한 락스, 크레졸 제품의 사용과 세탁기사용으로 환경오염이 시작되어 단체생활에 있어서 위생적이고 건강한 환경을 고심하던 중이었다. 우연히 1994년도 사회복지 법인 종사자들 교육 연수회에서 EM을 소개 받고 일본과 제주도를 오가며 미생물로 친환경을 되살리는 EM의 활용과 사용법을 교육 받게 된다. EM을 개발한 일본의 히가 테루오 교수는 소수의 영리를 추구함이 아닌 인류의 행복을 위해 이용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지구환경 살리기의 실천 비디오를 시청하게 하여 건강과 환경을 위한 EM의 중요성을 교육하였다.
EM의 사용으로 환경을 되살릴 수 있는 작은 방법으로 파괴된 생태가 다시 되살아나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로 발효퇴비 사용, 친환경텃밭 가꾸기, 천연 비누 만들기 등 작은 방법들을 실천하게 되었다. 각 사회복지시설에서도 크레졸과 락스를 빼고 EM활용으로 친환경 시설을 활용하게 되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많은 미생물 중에서 유익한 미생물을 조합, 배양하는 일상 생활의실천적 노력과 개발의 도전으로 2006년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소화아람일터가 꽃피었다. 현재는 장애인의 고용창출과 사람과 환경에 유익한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2000년대
2001년에는 광주대교구로부터 기증받은 성인여성발달장애인시설 ‘소화성가정’을 개원하였다. 그리고 미인가 남녀 혼합 작은 공동체로 생활하던 전주분원이 조건부시설을 거쳐 발달장애인 시설로 인정되어 ‘소화진달네집을 설립하고, 직업훈련의 일환으로 직업재활시설 ‘소화아람일터’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에 새로이 시작한 사도직으로는‘소화재속봉사회’를 마련하였다. 창설자의 가르침에 따라 삶 자체가 하느님과의 친교를 맺으며 그리스도를 따름을 목적으로 수도회의 영성을 배우고 실천하는 소화가족들의 영적동반을 하고 있다.
2010년대
소화설립 60년(2016년)을 바라보며 사회복지 사도직이 운영이념에 따라 잘 살아내고 있는지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당사자 중심의 서비스와 지역사회와의 연대성을 확대하고자 힘쓰고 있다. 이에 지역사회 재활사업인 정신장애 사회복귀시설인‘소화햇살둥지(2017-현재)’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사도직의 영성적 측면으로는 창설자 선생님께서 기도하신 자리에 ‘바위목 피정의 집(2010-현재)’을 지어 영적 쉼터의 피정의 집으로 개방하고, 수도회 전주분원에는‘다석 유영모 선생 기념관(2011-현재)’을 마련하였다. 또한 기독교의 여러 교파를 초월한 교회의 일치의 일환으로 기도모임인 ‘작은불씨 기도회(2010-현재)’를 2010년 10월부터 정기적으로 열어서 본 수도회의 고유한 카리스마(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해 기도)를 살려가고 있다. 소화정신 및 창립자영성, 수도회 역사 연구 등을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자료정리를 출간하기 위해‘소화출판사’(2017-현재)를 설립하였다. 그러면서 사랑의 복음화를 실현하기 위해 이 시대의 소외된 이들이 누구이며,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 것인지 수도회의 카리스마에 부합하는 시대적 응답을 고민하고 있다. 십자가상의 예수 성심의 자비와 사랑의 불꽃을 세상 사람들에게 당겨주는 작은 불씨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오는 수도회로 쇄신의 길을 걸어간다.
“작은 불씨” 라는 표현은 소화수녀회
창설자 김준호 레오선생님의 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임이여! 일찍부터 소화들의 희망은 오직 하나 불쏘시개였나이다.
‘쏘시개 나무’란 불쏘시개로 쓸 나무란 말입니다. 큰 기둥, 큰 통나무에 바로 불을 붙이려면 잘 붙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쏘시개를 큰 나무들 사이에 넣고 붙이면 큰 나무토막들이 잘 탑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겪으신 치욕을 함께 겪읍시다.(히브13:13)
임이여 저희 소화들이야말로 이름 없는 꽃입니다. 소화들에게 은총을 주시어 인류의 제단에 불쏘시게로 쓰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