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 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루가 10,27).”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과 회개의 증거를 행동으로 보이십시오. 왜 회개를 하겠습니까?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되기 위해 회개하는 것입니다. 본보기가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제자들은 우리 사부님께서 회개한 날부터라고 적고 있습니다.

회개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랑과 겸손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증거는 겸손이 없고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심장에만 피가 나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나 상처가 나면 피가 납니다.

성인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어느 말씀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말씀이든지 사랑이 통합니다.

모든 말씀을 모르더라도 한 말씀 알아들으면 다 알아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을 지녀야 합니다.

사랑하고 겸손할 때, 우주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완전히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완전히 희생할 때 육적으로는 몰락하고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은 사랑이 충만해지고, 우주를 소유하고, 인류를 소유하게 됩니다. 모든 인류와 우주를 사랑하였을 때 가난이 사랑스러워집니다.

가장 작은 이를 사랑한 것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가장 작은 것을 사랑했다는 것은 천하에 사랑 못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사랑한 결과로 가장 못난 것이 사랑스럽습니다. 가장 못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한 14,15).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주를 사랑하는 것이고,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고,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가 예수의 살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로 사랑스러워지는 것이 우주적 자각입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 사랑할 줄 알아야 하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다, 적다는 하나입니다.

그것이 분열되면 인격이 분열되고 사랑이 분열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비교해서 분별하면 이로운 것만 사랑하고 손해 보는 것은 미워합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미움이 없어진 만큼 사랑합니다.

사랑하려면 모두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구별할 것이 없습니다. 화목이 무엇입니까? 미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이 하느님 발등성이고 옷자락인데, 하느님 옷자락을 미워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모든 만물이 사랑스러워질 때, 하느님과 화목이 되는 것입니다.(골로 3,11 참조)

빈부귀천을 초월해야 하지 저 사람만 불쌍하다 하면 사랑이 안 됩니다. 불쌍하다면 피조물 모두가 불쌍합니다.

항상 피조물은 미완성이고 항상 슬픈 것이니 사랑과 겸손을 지녀야 합니다. 불평,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은 평화이고 행복합니다.

우리는 육적으로 지혜롭고 밝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공동체가 왜 불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육적으로 지혜로우면 불화가 일어납니다. 오히려 더욱 단순하고, 겸허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두 성인의 영성은 단순성입니다.

실제 그렇게 사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종들이 되어야 하며 하느님 때문에

피조물인 모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랑스러우면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의 옷자락, 얼굴, , 발이므로 사랑이 됩니다.

사랑하는 분의 지체이고, 옷자락이므로, 미운 것이 없습니다.

내 살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베드로 성인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1,2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글 : 김준호 레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