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신비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세례도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1요한 5,6)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 (요한 14,26)

의식과 제도는 사람이 운영합니다. 그러나 그 의식과 제도를 통하여 보호받으면서 영혼은 하느님의 성령을 통하여 직접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직접 사랑이 없어지고 껍질, 법, 계율만 집착하면 영혼이 쓰러집니다. 직접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법을 초월해야 합니다. 가르치시는 분은 협조자입니다.

직접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어느 순간에 성령이 직접 오셔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으로,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적인 분을 모셔야 합니다.

혼자 있을 때 더 확실해져야 합니다. 성령을 만나도록 수련장 수녀님이 오셔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화목케 하는 역할입니다. 사명을 갖고 와 계십니다.

신부님께서 매일 미사 집전을 드리는 것은 우리 영혼이 화목케 되도록 예수님의 피와 살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직접 찾아오셔서,

이로 인하여 사람에게서는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살아 계시는 한,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시오(1요한 2,27).” 

이 말씀은 소화 데레사 성녀의 영성이 두드러진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화목케 하려고 가르치십니다.(요한 14,17; 14.26 참조)

사람에게서 가르침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가르멜 수녀원 계율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수련장 선생 수녀가 되어서도 주님께만 의지합니다. 순간순간 주님이 가르쳐주십니다.

제삼자가 보면 모릅니다. 성령이 직접 성녀의 몸을 쓰십니다. 완전히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분이십니다(요한 4,24a).“ 

영이란 말은 직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영은 예수 성심께 순종하고 직접 예수님의 영에게 지도받는 것입니다. 항상 성심이 우리를 지도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지혜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십니다(1고린 2,10).”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빌린다면 “수녀가 된 다음에 죄짓고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기 전에 택하시고 미리 죄를 아시고 미리 용서하신 것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소화 데레사 성녀께서는 “사람 되기 전에 미리 빼내시고 작정하시고 미리 용서하셨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사람의 언어로 감사가 안 됩니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언입니다. 관상 생활입니다. 기도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관상기도는 수동적입니다.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사랑을 감당 못 하고 감격해서 멍하게 앉아 있습니다. 너무 사랑이 강해서입니다.

아기 때에는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엄마, 잘못했어요.” 하고 용서를 받은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내가 죄를 짓기 전에

엄마는 미리 용서하시고 미리 사랑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달하십니다.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 성령의 불이 여기에 떨어졌습니다.

아주 미약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파 안에 있는 수도원이 아니고 모든 종파를 초월해서 화해하는 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이 화해와 사랑의 영성이 커지면 인류에 평화가 오고 우주에 평화가 옵니다. 특별한 하느님의 영적 특권을 주시려고

선택된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밖의 인재까지 화목케 하는 일꾼을 만드는 곳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화목케 하는 그 직분을 우리한테 주셨습니다. 다른 종파에까지 성령의 불을 붙여 화목케 하는 사명을 주기 위해서 선택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전능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 일꾼은 무명해야 합니다. 이름도 성도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이 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말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느 자매가 20여 년 전에 수녀를 만났습니다. 

“수녀가 되고 싶어요.” “영세를 받았나요?” “아니요. 신교 신자입니다.” “그러면 사회복지 법인인 소화자매원에 가 보십시오.

신교인들 사는 공동체입니다.”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주교님이 허락하셨습니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허락하실 수 없었습니다.

소원은 50년 전부터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원을 누가 하였겠습니까? 사람이 하였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직접 마음을 주신 것이고 성령께서 시킨 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그 마음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소원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이름도 성도 없는 찌꺼기를 불러 가지고 일을 하십니다. 그걸 자각하신 분이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무식한 사람을 택하여 쓰신 것이 세계를 화목케 하는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된 것입니다. 이 공동체 영성이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체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찌꺼기, 못난 것, 부스러기, 무명, 아무 데도 쓸모없는 사람을 불러서 하느님께서 일하셨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가 했던 말씀입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왕국을 가지신 이가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얼굴에 피가 묻고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얼굴을 쳐다보면 고개가 숙어집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을 때 눈물뿐입니다.

너무 비참하고, 너무 매 맞고, 멸시받으시고, 침이 있고, 피가 있고, 가시관이 있고, 처절한 아픔이 있습니다.

아! 예수님의 얼굴과 같이 내 얼굴도 모든 사람의 눈에 가려지고 이 세상 사람은 아무도 나를 몰라보는 것이(이사 53,3~4 참조)

제 원이었습니다. 저는 괴로움을 당하고 잊히기가 간절한 원이었습니다.” 이 성녀의 말씀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쏘시게는 사람이 볼 때 눈에 띄지 않고 아무 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재목이라야 갖다 쓰지 부스러기를 누가 갔다가 쓰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소화 데레사가 그걸 흠모하였고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이 그것입니다.

이 원은 하느님께서 계시고 우리에게 주신 보물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모습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불쌍하지만, 내적으로는 사랑이 충만하고 행복한 영성입니다. 

복음삼덕을 상식적으로는 잘 압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욕망 덩어리이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몸 안에 있는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 여섯 치도 못 되는 속에 욕심이 큽니다. 우주를 다 주어도 마음에 안 찹니다.

이것을 통제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자기 정(情)을 못 박으십시오. 성경은 단순하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갈라 5,24).”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순결합니다. 영과 육이 순결합니다. 정이라는 욕심을 죽입니다. 

교황 요한 23세의 일기를 보면 “성인은 정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성령이 울타리가 되시고 지켜주고 있는 상태입니다·

성령이 떠나시면 곧 곰, 사자, 늑대가 뛰어나옵니다. 죽은 다음에 성인이지 죽기 전에는 성인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덕이 높은 사람도 몸이 있는 동안에는 속(俗)에 갇혀 있습니다. 욕망이 통제만 되어 있지 죽은 것은 아닙니다.” 라는 글이 나옵니다.

예수께 속한 사람은 육체를 그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가난은 물질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고,

물질세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덕입니다. 천하를 다 주어도 욕심이 다 차지 않습니다. 몸 안에 있는 욕심을 죽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순결을 지키는 것과 욕망을 죽이는 것은 성령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명을 서원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덕이 없으니까 순명이 안되는 게 아니고, 덕이 높고 유명해지고 성인 말을 들어도 자유의지는 그렇게 죽이기가 어렵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됩니다. “내가 함께한다.”(요한 14,17; 21; 23 참조) 성령이 오셔야 관상기도가 됩니다. 자기 의지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아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프란치스코 성인과 소화 데레사 성녀이십니다. 

“가르멜 동산에 옮겨 심어진 어린 꽃은 십자가 그늘에서 활짝 피어나게 되었습니다.

주의 눈물과 피를 단 이슬로, 눈물이 덮인 공경하올 얼굴을 태양 삼아 ··· 예수님의 얼굴이 본입니다.

그 처절한 얼굴을 태양 삼아 그때부터 저에게 성면(聖面) 안에 감추어 있는 보배를 가르쳐주셨으며,

가르멜의 우리 형제 가운데 제일 먼저 들어가신 것처럼 우리 정배의 얼굴에 감추어진 신비를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언니가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법을 가르쳐 주시러 오신 분이 수련장 수녀님이십니다. 자기가 살아있으면 왕이 되어 버립니다. 자기가 죽어야 예수님의 정배가 됩니다.

참된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남이 몰라주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업신여기기를 좋아하는 것,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기를 좋아하는 것만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지도자가 되셨습니다.

수도회의 사명은 소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모든 성교회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입니다. 확실한데도 항상 영혼이 괴롭고 불안합니다.

가르멜에 들어왔을 때 저는 제가 지도받을만한 분을 만났습니다. 사람에게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님이 외국에 가셨습니다.

편지해도 답장이 안 왔습니다.” 젖이 떨어졌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고 형태가 있는 피조물에게 의지하였습니다.

그 젖을 떼시고 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시련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수련을 받는 기간이 1년을 해도 모자랄 텐데 단기간이었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만나서 지도를 받게 하신 것은 성령께만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것도 아셨습니다. 만세 전에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지도를 받고 싶은 게 안 되니까 결국 예수님께 향합니다.

“제 마음은 지도자이신 분에게로 향하였습니다.”(마태오 11,25~27 참조)

그때 박식한 사람들과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그 학문을 가장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시며, 가르쳐 주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런 사연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하느님의 하신 일은 사람의 지혜로는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유영모 선생님의 ‘내일 죽고, 어제 묻어, 오늘 산다.’ 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친히 이끌어 주셨습니다.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점진적으로 필요해서 조금씩 지도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제일 못난 공동체입니다. 언제나 와 보아도 주인이 없었습니다.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성 프란스코와 소화 데레사 성녀의 말씀이 열두 광주리의 양식입니다. 그냥 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딛고 가야 할 디딤돌입니다.

이 돌을 딛고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아! 주여, 당신은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시지 않는 것을 저는 압니다. 당신은 제 약함과 불안전함을 저보다도 더 잘 아시며, ··

오! 저의 예수님, 당신이 제 안에 계시어 자매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제가 자매들을 당신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게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당신은 잘 아시나이다.

당신은 이 은혜를 제게 주시고자 이를 당신이 제 마음속에서 사랑하고자 하신다는 것을 이 명령이 확실히 알려주기 때문에 저는 이 명령을 사랑하나이다.

제가 자애(慈愛) 깊을 때 제 안에 계신 예수께서 홀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을 저는 깨닫습니다. 제가 예수님과 결합하면 할수록 모든 자매들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성모님이 오시면 직접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분은 성모님의 딸입니다. 여러분도 성모님의 딸입니다.

성모님의 딸이 오셔서 성모님의 딸이 되도록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 교훈이 있습니다.


                                                                        << 김준호 레오>>